2004년, 러플린 총장이 취임하면서부터 KAIST에는 이른바 '변혁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러플린은 'Pre-Med와 Pre-Law 과정의 설립', '등록금 600만원 수준의 사립화', '입학정원 2만명 수준으로 확대(현재 입학정원 7000명 수준)' 등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KAIST의 설립 이념,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학생과 교수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러플린은 2006년 임기가 끝나고 재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러플린의 후임으로 취임한 인물이 바로 현 총장인 서남표. 그 역시 취임한 이후 KAIST의 모습을 바꿀 여러 가지 개혁안을 내 놓는다. '신입생 입학 정원 1000명 확대', '성적에 따른 등록금의 차등 징수', '전 과목 영어강의' 등.
흥미로운 것은, 서남표 총장의 개혁안이 러플린의 개혁안과 겹치는 부분이 많음에도, 러플린의 개혁안에 교수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했던 것에 비해 교수 사회의 저항이 적었다는 점이다. 저항은 커녕 많은 교수들의 지지를 얻어내기도 했다.
실제로 2006년 가을학기 '인간과 기계'라는, 매주 기계과 교수들이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수업을 했던 강의에서 몇몇 교수들은 '러플린 총장은 이 학교의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현재 서남표 총장은 이 학교를 다시 일으켜세울 개혁을 추진중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자주 했다.
교수들의 동의를 얻은 상태에서, 서남표 총장의 개혁안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추진되었다. 순식간에 다음 년도의 신입생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평균평점 3.0 이하의 학생들에게 거액의 등록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해외 인턴십을 장려하기 위한 LSB(Long Summer Break)정책도 바로 실행되었다.
완충기간 없이 진행된 일련의 개혁은 당연히 부작용을 낳았다. 특별한 기숙사 확충 없이 신입생을 받음으로써 수요에 비해 기숙사가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KAIST 계급상 약자에 해당하는 연차초과자에게 직격탄이 날아들었다. 먼저 연차초과자들이 기숙사에서 쫓겨나 학교 외부의 거주지를 마련해야 했다.
대전시의 대학들이 공동 출자하여 외국인을 위한 기숙사로 건립한 '누리관'을 기숙사로 활용하더라도 점증하는 신입생을 수용하지 못하여, 이제는 비 연차초과자 마저도 기숙사에서 나가야 할 운명에 처했다.
LSB 정책이 처음 시행되었을 당시, 서남표 총장의 개인 일정과 변경된 학사일정 때문에 졸업식 날짜가 갑자기 변경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LSB의 명분이었던 '해외 인턴십 지원'도 학교에서 충분한 자리를 제공해 주지 못했고, 또 '방학 기간에는 학교 밖에서 경험을 쌓으라'는 명분하에 계절학기 과목을 대폭 축소했다.
명분이야 좋으나, 당장 계절학기 수강을 수강 계획에 포함시켜 놓았던 학생들, 혹은 인턴십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과의 학생들이 이 정책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학교 정책이 나오거나, 학교 정책이 변경될 때마다 나오는 공통의 불만이 있다. "왜 학생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느냐", "그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학생의 입장은 왜 고려하지 않는가" 이다.
이번 총학생회 선거 사태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학교 당국은 일방적으로 '연차초과자는 학생대표가 될 수 없다'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물론 교칙 개정에 대한 아무런 예고나 합의도 없이. '학생대표'를 뽑는 규정을 학생과의 합의도 없이 변경한 것이다.
당연히 KAIST 학생들은 들고 일어났고, 이에 대한 학교측의 답변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학생들도 참을 수 없어 지속적으로 철회를 요청하였고, 총학생회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학교측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몇몇 학생들은 다음 아고라와 이글루스 등의 커뮤니티에 이 사태를 알리는 글을 올렸고, 어느 정도의 호응을 얻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백경욱 학생처장이 이 일에 대한 글을 학교 포털에 작성하였다. 내용은 조금 길기 때문에 접어둔다.
펼쳐두기..
이 글을 통해, KAIST란 학교가 학생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학교의 문제를 대외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혹은 'KAIST의 명예와 업적을 훼손하는' 행동이며, KAIST는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묵묵히 학업과 연구실에 몰두하고 있는 대다수 학생들을 위하여'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KAIST 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학교의 명예, 그리고 학교 정책에 순응하며 묵묵히 따르는 학생이다.
학생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교육기관으로 대표적인 것이 있다. 바로 사관학교. 명예, 전통 등을 그 어느 대학보다도 앞세우며, 학교측의 방침에 따라 학교와 국가가 원하는 인재로 거듭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는 교육기관.
사실, KAIST는 설립될 때부터 사관학교와 비슷한 이념하에 설립되었다. 전교생 기숙사 지원, 학비 지원 등을 통하여 학생들이 다른 데 눈 돌릴 일이 없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개교 당시인 70년 대에는 많은 이공계 연구소, 대기업 등이 KAIST에서 배출되는 인력을 흡수하여 주었고, 졸업생들은 사회적에서도 좋은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누군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겠는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과 같은 KAIST의 신화는 이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이제 시대는 변했다. 더 이상 KAIST졸업이 안정된 직장과 높은 사회적 대우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학생들이 '그때 그 시절'처럼 공부와 연구에 몰두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 성공할 것이라 학생들을 유혹한다. 자신들이 세워 놓은 정책에 따라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만약 사관생도들이 졸업 후에 소위 임관과 어느 정도의 장기 근무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사관학교가 사관생도들에게 부여하는 규제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결국 지금의 KAIST가 앓고 있는 문제들 중 몇 가지는, 이렇게 사관학교 시스템을 본떠 출발한 학교가 시대의 변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학생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방법은 두 가지다. 예전처럼, 학생들이 학교의 규제에 따를 경우 99% 안정된 직장과 대우를 보장해 주던가. 아니면, KAIST 도 이제 더이상 특수한 대학이 아니라, 여타 대학과 다를 바 없는 교육기관임을 인정하고 학생들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던가.
무엇이 쉬운지는 눈에 보인다. 지금의 환경 하에서 첫번째 대안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학교가 자세를 바꾸는 수 밖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답답하기 이를 데 없군요...
답글삭제저도 잘 읽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링크해가도 될지요.
답글삭제@lovos - 2008/12/02 08:54
답글삭제정말 답답합니다. -_- 졸업생으로서 여러 애증이 얽힌 모교지만, 그래도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는데, 요즘은 그저 한숨만 나오네요.
@이원형 - 2008/12/02 13:44
답글삭제네, 링크하셔도 좋습니다. ^^
글 잘 읽었습니다. 졸업생 입장에서 세상도 뒤숭숭한데, 학교가 뒤숭숭하니.. 참 보기에 딱하고 안쓰럽네요. 교내 학생들이 어느 정도 움직여서는 꿈적도 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학교가 학생들을 밀어붙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글삭제trackback from: 변질되어가는 KAIST
답글삭제학교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 졸업생들과 현재 학생들의 반발을 사고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단지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만 치중한다면,
그건 변화에 따른 진통이라고 봐야 할까, 쇠퇴에 따른 부작용이라고 봐야할까?
우수한 이공계 인력을 길러내는 것이,
단지 과거의 영광을 안고 있는 학교의 졸업장을 안겨주고,
빛나는 건물로 과시 좀 하고,
대외적으로 평
@익살 - 2008/12/04 10:35
답글삭제익살님이 여기까지 ^^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기엔' 우리 학교 학생들이 잃을 게 너무 많죠.